고창 들판 위 단아한 풍경, 영모정에서 만나는 시간의 고요
가을 바람이 선선하게 불던 오후, 고창 아산면의 들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길가에 갈대가 흔들리고, 멀리 낮은 언덕 위로 단정한 지붕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기와의 선이 부드럽게 하늘을 그리며 이어지고, 그 아래로 고요한 마루가 드러났습니다. 바로 영모정이었습니다. 주변은 논과 밭이 펼쳐져 있었고, 멀리서 들려오는 새소리와 바람소리가 자연스러운 배경음이 되었습니다. 마루에 걸터앉자 나무의 온기가 전해지고, 발아래로 들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였습니다. 오래된 정자의 단아한 형태와 풍경의 여백이 어우러져,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이 감돌았습니다.
1. 들길 끝에서 마주한 정자의 첫인상
고창읍에서 차량으로 약 20분 정도 달리면 아산면의 시골길 사이로 ‘영모정’이라는 작은 표지판이 보입니다. 좁은 도로를 따라가면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하나 있고, 그 위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낮은 언덕길이 이어집니다. 그 끝에 영모정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입구에는 돌담이 길게 이어지고, 담장 옆에는 오래된 감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주차 공간은 크지 않지만, 주변이 한적해 접근이 어렵지 않습니다. 이른 아침이나 해 질 무렵에는 햇빛이 기와에 부드럽게 닿아 윤기가 나며, 마루에 앉으면 바람이 얼굴을 스치듯 지나갑니다. 정자에 오르는 순간, 도시의 소음이 완전히 사라집니다.
2. 구조의 단정함과 공간의 조화
영모정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규모의 팔작지붕 구조를 가진 전통 정자입니다. 목재의 비례가 정확하고, 기둥의 간격이 일정해 안정감이 느껴졌습니다. 마루는 높게 들려 있어 사방이 트여 있으며, 바닥의 나무판 사이로 빛이 은근히 스며듭니다. 천장은 서까래가 드러난 단순한 구조지만, 그 교차선이 아름다운 리듬을 만들어 냅니다. 기둥의 표면은 손으로 문질러 닳은 듯 매끄럽고, 일부에는 세월이 남긴 색 변화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정자 아래에는 바람이 자유롭게 통하며, 그 흐름이 내부의 온도를 자연스럽게 조절합니다. 단정한 선과 여백의 미가 공간 전체를 감싸고 있었습니다.
3. 영모정의 역사와 그 이름의 뜻
영모정은 조선 후기 고창 지역 유학자들이 학문을 익히고 교류하던 곳으로, 선현의 뜻을 기리고 인의를 실천하자는 의미로 세워졌다고 전해집니다. ‘영모(永慕)’는 ‘길이 그리워하다’는 뜻으로, 조상을 기리며 덕을 본받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정자 내부에는 당시의 현판이 보존되어 있고, 글씨는 흘림체로 힘 있고 단아합니다. 구조적으로는 학문정의 전형을 따르며, 군더더기 없는 형태 속에 사유의 공간이 드러납니다. 학자들이 모여 시를 짓고 글을 논했던 자취가 지금도 느껴질 만큼, 정자에는 조용한 긴장감이 남아 있었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품격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4. 자연 속의 고요한 정자 풍경
정자 주변은 산과 들이 부드럽게 맞닿아 있습니다. 봄에는 유채꽃이 들판을 덮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이 정자의 기와를 감쌉니다. 가을이면 벼가 고개를 숙이고,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정자의 마루까지 닿습니다. 겨울에는 눈이 쌓여 지붕선을 따라 흰 선이 그려집니다. 정자 옆에는 작은 개울이 흘러 물소리가 일정하게 이어지고, 그 소리가 오히려 공간을 더 고요하게 만듭니다. 마루에 앉아 있으면 햇빛이 기둥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며 하루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풍경이 정자 안으로 들어오고, 정자가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있는 듯했습니다. 단순하지만 완벽한 조화였습니다.
5. 함께 둘러볼 수 있는 아산면의 명소
영모정을 둘러본 뒤에는 차로 10분 거리의 덕천사와 무장읍성지를 함께 방문하면 좋습니다. 덕천사는 산중의 고요한 사찰로, 영모정의 단정한 분위기와 대조를 이루며 서로의 매력을 더해 줍니다. 또한 아산면 일대에는 고창의 전통 한옥과 옛길이 잘 보존되어 있어 걷기 여행으로도 적합합니다. 가을철에는 인근 들판에 억새가 피어 바람결이 한층 풍성해집니다. 방문을 마친 뒤 마을 입구의 전통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잠시 쉬어가면 좋습니다. 한적한 시골의 풍경과 정자의 고요함이 자연스레 이어지는 여정이었습니다. 짧지만 깊은 휴식이 되는 길이었습니다.
6. 방문 전 알아두면 좋은 점
영모정은 입장료 없이 자유롭게 방문할 수 있습니다. 다만 마루가 높아 오르내릴 때 주의가 필요하며, 비가 온 다음 날에는 바닥이 미끄럽습니다. 여름철에는 벌레가 많으니 긴 옷차림을 권합니다. 봄과 가을에는 햇빛이 부드럽고, 오후 시간대에 방문하면 정자 뒤 산 그림자와 들판의 빛이 아름답게 어우러집니다. 주변에는 별도의 시설이 없으므로 물과 간단한 음료를 챙기는 것이 좋습니다. 정자 내부에서는 음식물 섭취를 삼가고, 신발을 벗고 오르는 것이 예의입니다. 정숙하게 머물며 바람과 햇살을 느낄 때, 영모정의 매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마무리
영모정은 크지 않은 정자이지만, 그 안에 담긴 고요함과 품격은 넓었습니다. 나무 기둥 하나, 기와의 곡선 하나에도 세월의 정성이 묻어 있었습니다. 들판을 내려다보며 마루 끝에 앉으니 바람이 천천히 지나가고, 마음이 고요해졌습니다. 사람의 흔적보다 자연의 시간에 더 가까운 공간이었습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며 정자에 노을빛이 번질 때, 모든 색이 부드럽게 하나로 녹아들었습니다. 다음에는 봄 안개가 피어오르는 이른 새벽에 다시 찾아, 정자 위로 스며드는 빛을 보고 싶습니다. 조용히 머물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 이들에게, 영모정은 가장 단정한 쉼의 자리가 되어 줄 것입니다.



